從享으로는 東에는 程顥ㆍ薛聰ㆍ安裕ㆍ金宏弼ㆍ趙光祖ㆍ李滉ㆍ李珥ㆍ金長生ㆍ金集ㆍ宋浚吉을, 西에는 朱熹ㆍ崔致遠ㆍ鄭夢周ㆍ鄭汝昌ㆍ李彦迪ㆍ金鱗厚ㆍ成渾ㆍ趙憲ㆍ宋時烈ㆍ朴世采 등 24현이 모셔져 있다. 매년 8월 27일 釋奠祭를 봉행하고 있는데, 향교의 주향으로는 문선왕 공자를 봉안하였으며, 配享으로는 顔子ㆍ子思ㆍ曾子ㆍ孟子를 모시고 있다. 변벽은 뒤에 卞仲良ㆍ卞季良 형제와 함께 병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변중량ㆍ변계량 형제는 밀양변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1776년(영조 52) 居昌 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동쪽으로 昌原, 서쪽으로 咸安, 남쪽으로 鎭海, 북쪽으로 靈山과 접하여있다. 그 후 변청의 후손들은 屛山에 세거하였는데, 크게 현달한 인물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윤유는 1681년(숙종7) 진사시에 합격한 후 현령을 지낸 것이 이력의 전부이지만 뛰어난 학행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고려 초에 이르러 降州라 한 후 다시 진주鎭州라 개칭하고 현종 때에는 청주에 속하였다.

한편 星州李氏 와의 분쟁은 從孫 李秉佑가 변씨 가에 판 묘자리를 從祖母 星州李氏가 還退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판 것으로 사안 자체는 간단하였지만 李氏 가에서 발생한 偸葬 사건 문서들을 양도받아 관련문서가 13건에 이른다. 이에 교임을 맡고 있던 李在淵, 黃龜淵, 裵文翊 등이 보수를 위해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한달동안 3백냥을 모금하여 수리를 마치게 되었다. 1901년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금액이 기재된 문서만을 기준으로 하여도, 도산서원의 寶木 봉안시의 접대 경비 150냥, 龜巖 문집 중간 분담비 150냥, 二宜亭 중건비용 분담 253냥 등 총 553냥을 부과받고 있다.別號로 龜城 또는 武陵이라 하였다. 부과된 금액은 향교의 공의를 통해 마련 방법을 모색하였으며, 해당 읍의 문중을 단위로 부담금을 분납하기도 하였다. 데스크톱 버전 및 대전오피 Visio 업데이트하려면 해당 제품의 구독 계획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1904년에는 성전중수를 주관하였던 선친 孫亮錫의 현판 유묵을 본 창녕군수 孫鎔憲이 자신이 칠원겸사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님을 깨닫고 감화되어 동서재 보수를 위해 약간의 돈을 내어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종12년(1846) 현감 孫亮錫이 부임이후 퇴락한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이때에 周相文, 黃瀞 등 지방 사족의 도움을 받아서 토목 공사를 마감하였다. 고종 15년(1878) 현감 金尙鍾은 성전에 비가 세고 담장이 무너졌으며 동서재의 기와가 걷혀 기둥이 휘어지고 문과 벽이 성한 곳이 없는 향교의 모습에 개연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5월 5일 정윤호가 변오석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고, 변오석 등은 다시 정소하여 정윤호가 이장할 뜻이 없는 것이라며 官掘을 요청하였다. 각각의 사료명은 소장자가 붙인 제목을 그대로 옮겼으며, 별도로 제목이 없는 경우에는 자료의 내용을 감안하여 임의로 작제하였다. 순영 樂育齋에서 주관하는 모금의 경우에는 都會에 참석하지 않은 경우 벌금이 부과되기도 하였는데, 1903년에는 50냥, 1904년에는 20냥이 각각 벌금으로 부과되었다. 향교에서는 이러한 분담금을 儒戶에 부과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부당하게 여긴 유생들은 고을의 民庫에서 부담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개인의 소송 및 청원 문서는 다양한 所志類를 통해 관에 제출하였으나, 향교에서는 품목의 형태로 문서를 제출하였다. 이로서 파평윤씨 집안은 소론으로서 점점 중앙 정계가 멀어져갔으며 ‘노성문중’이라는 통칭 속에서 자신들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다양한 모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말 선초 官學 중심의 학풍을 대표하는 학자로 전후 20여년 동안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전한다. 1908년에 지방유지들에 의해 사립계산학교(私立稽山學校)가 개교되었다가 1909년에 사립보통학교로, 1910년에 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어 교명을 영동공립보통학교로 개칭했는데, 지금의 영동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이외에도 望記ㆍ秋收記ㆍ地籍圖ㆍ山圖ㆍ婚書ㆍ哀感錄ㆍ葬擇記 등 일상 생활과 관련된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土地賣買契約書를 보면 형식에서도 所在地, 番號, 地目, 稅賦, 夜味, 價額, 賣渡年月, 賣渡人, 買受人 등으로 항목을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전답안의 작성방식은 전답소재지ㆍ면적ㆍ字號ㆍ地番, 그리고 用途를 기재하였다. 즉, 미수 허목의 문집 중간ㆍ영정 보수ㆍ이의정의 중건 등을 위해 모금과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의 통문 16건, 남명신도비 건립 문집중간ㆍ남명정사 중건 등 9건, 주자영각과 영정 개수ㆍ궐리지 중간 ㆍ주자어류의 간행 등에 대한 협조 요청 7건 등이 있다. 통문은 서원이나 향교 등에서 同類의 기관이나 관계인원 등에게 공공의 문제를 通知ㆍ通告하는 문서인데, 칠원향교에는 19세기∼20세기 초에 해당하는 통문 97점이 전한다.